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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한 열망-4.19혁명

https://youtu.be/b2Wltj7U0RA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됩니다. 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 후보로 이승만이 민주당 후보로는 조병옥이 후보로 입후보하게 되는데요. 그 외에도 여러 정당과 후보자가 출마를 시도하지만 출마를 시도한 정당과 후보자들은 정치깡패의 방해로 입후보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한편 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에서는 이기붕후보가 민주당 후보로는 장면 후보가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후보 조병옥후보

이기붕 후보 장면 후보

그러나 선거운동 중이었던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위 수술을 받게 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입원한 후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며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선거인 총원의 1/3이상의 득표를 얻으면 대통령이 되는 선거법 규정에 따라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80이 넘는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대통령이 서거하게 되면 대통령 자리에 취임하게 될 부통령 자리를 두고 현직이었던 장면과 자유당과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기붕간의 경합이 치열해지게 되는데요. 대통령 선거가 있기 2년 전 치러진 총선에서 126석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부정선거와 이승만의 독재 속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이기붕의 부통령 선거는 불리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1960년 치러진 선거에서 각종 부정 선거가 자행되게 되는데요. 선거전 야당 선거원들은 탄압과 체포를 당했으며, 선거에 개입할 수 없는 경찰과 공무원의 선거 개입 그리고 정치깡패까지 동원한 불법선거가 횡행하게 됩니다. 야당 선거인 참관인들은 투표장에서 축출되었고,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를 해야 했으며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참관인에게 투표용지를 보여야 투표함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 두어 진짜 투표용지와 바꿔치기를 하는 등의 불법선거로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위기의 도화선이 되게 됩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마산의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각종 시위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3.15 선거결과 75% 가까운 지지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선거 결과로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지게 되고 이를 강경 진압한 내무장관 최인규가 홍진기로 교체되는 등 내홍을 겪게 되죠. 뿐만 아니라 전남 광주시의 투표소에서 부정 투표를 발견한 시민이 이에 항의하자 정치깡패가 동원되어 폭행이 일어났고 이에 광주시민들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1960년 3월 15일 마산의거때 마산 상고에 다니던 김주열 열사가 행방불명 된 뒤 27일 만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류탄이 눈에 박힌채 변사체로 발견되게 된 것이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이 부산일보의 기사로 알려지게 되고 서울지역 대학생 2만여명이 당시 경무대와 중앙청 이기붕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이게 되어 군중들이 몰리자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합니다.

재선거와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시위대의 외침에 계엄령이 선포되게 되었고 위기를 느낀 시위대가 경찰을 습격하여 무장을 하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계엄령으로 주춤하던 시위대의 시위는 학생중심에서 시민의 참여로 번져갔고 4월23일 임기가 4개월 남았던 장면 부통령이 민주화를 돕겠다며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계엄군에 의해 학생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한 대학 교수단이 대통령 하야등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한 후 시위대에 합류하며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자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 법무장관 권승렬, 외무장관 허정 등의 설득 끝에 4월 26일 라디오를 통해 하야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승만의 하야로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에 권한대행으로 외무장관이었던 허정이 취임하였고 허정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몰래 하와이로 망명하여 살다가 196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한편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 중의 한명이었던 이기붕과 그 일가는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던 아들 이강석이 정치테러와 부정부패로 수많은 국민을 죽게 만든 아버지 이기붕에 대한 증오를 참지 못하고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인 이강욱을 권총으로 쏴 살해하고 본인은 자살하며 불행하게 마무리되게 됩니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과 이승만의 망명이후 같은 해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을 내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지만 제2공화국은 1961년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부정부패와 독재타도라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시작점이라 불리우지만 무능함과 보수적 색채를 가진 정권에게 권력이 이양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의 미완이라는 평가를 받는 4.19혁명.

전세계적으로 팬데믹을 일으킨 전염병이 유행중임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66%가 넘는 투표율을 보이며 전세계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보여준 지금 우리 모습의 시발점을 기억하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잘 실천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이상 모다담이었습니다.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