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2년 4월 15일 차가운 북대서양 한 가운데 거대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 호가 두동강 난 채로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음으로 출항을 한지 5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는데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최악의 재난사고가 일어난 것이었죠.
타이타닉은 영국의 해운 기업이었던 화이트 스타라인이 보유한 배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배로 총 11층 규모로 승객들은 1등석부터 3등석까지 분류됐으며, 대다수의 승객들은 3등석으로 배에 탔지만, 배의 대부분 시설은 이들보다 30배 넘는 비용을 지불한 1등석 승객을 위한 것이라 할 만큼 호화스러움을 자랑하는 배였죠.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을 향해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 ·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의 인원을 태우고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타이타닉호는 출항을 하면서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전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4월 14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선원들이 인근에 얼음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은 채 최고속도에 근접한 속도로 운항을 계속했다고 하는데요. 사고 이후에야 빠른 항속이 배가 침몰한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으나, 당시에는 빙하가 많은 해역에서 빠른 속도로 운행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하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깜깜한 바다에서 뒤늦게 견시수가 6개의 커다란 빙하를 발견하고 조타실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조타실에서 위험을 견지하고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전면충돌은 피하였으나 옆면과 빙하가 부딪히게되고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타이타닉 호 안으로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타이타닉 호는 4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어 일부 침수돼도 떠 있도록 설계돼 있었지만 충돌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기에 침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호의 스미스선장은 긴급탈출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총 68척의 구명정을 실었어야만 했던 타이타닉호는에는 20척의 구명정만이 실려 있었고 중앙통제실도 없었고 조난에 대해 경험이 없던 선원들에 의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원칙을 여자와 아이들만이라고 알아들은 일부 선원에 의해 몇몇 구명정은 정원을 채우지도 않은채 떠나게 됩니다. 게다가 구명정에 타고 있던 승객의 대부분은 1,2등석 승객들로 3등석 승객들은 미국법에 의해 1,2등석 승객들과 격리되어 있었고 일부 선원들이 3등석 승객들에 의해 구명정에 생길 혼란을 막기위해 일부구역을 폐쇄했기에 3등석 승객들이 구명정에 탑승할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3등석 승객의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지막 구명정이 떠나고 배에 남은 사람들은 선미에서 토머스 바일스 신부님과 미사를 드리며 마지막을 준비하였으며, 구명정에 타지 못한 몇몇 승객들은 바닷물에 뛰어 들었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안에 남아 마지막을 준비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타이타닉의 악단이 승객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들도 역시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2시 무렵 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타이타닉호는 캄캄한 바닷속 깊은 곳으로 침몰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취를 감춥니다. 한편 바다에 남은 사람들도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는데요. 바닷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거나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부속품에 부딪혀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2℃의 차가운 바닷물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으나 구명정에 타고 있던 대부분은 그들을 태우길 거부했고 바다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이타닉이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도착한, 선장 아서 로스톤이 맡은 카르파티아호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하며 2,223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싣고 첫항해를 시작했던 타이타닉호는 706명의 생존자를 남긴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기억해둘 사람들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
은퇴예정이었던 노선장으로 회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타이타닉의 선장을 맡았던 그는 무리한 항해로 타이타닉을 침몰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구명정에 오르지 않고 영화에서처럼 조타실에서 방향키를 잡다가 물에 쓸려 사망했으며, 마지막까지 선장으로써의 본분을 잊지 않아 귀감이 되었습니다.

타이타닉의 연주자들과 토머스 바일스 신부
영화를 보면 침몰을 앞두고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위로하듯 한쪽에서 조용히 연주를 하고 있던 연주대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미사를 드리는 신부님의 모습이 인상깊은데요.
8명으로 이루어진 연주대는 스미스 선장의 요청으로 타이타닉호가 침몰 10분전까지 연주를 하다 서로의 행운을 빌고 헤어졌으나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 바일스 신부님의 경우 성직자로서 본분을 잊지 않고 구명정에 오르지 않고 남은 사람들과 갑판에서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하다 선종하였다고 하죠.


이시도르 스트라우스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개인적으로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중의 하나가 노부부가 함께 1등석 침실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채 죽음을 맞이했던 장면이었는데요. 이는 당시 메이스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 스트라우스와 아이다 스트라우스에 이야기였다고 하죠. 여자와 아이들 먼저 원칙으로 구명정에 부인만 오를수 있게 되자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구명정에 타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하녀을 앉히고 그녀에게 자신의 모피코트를 입혀서 태워 보내고 스트라우스부부는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1912년 4월 15일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재난 중의 하나인 타이타닉의 침몰이 있었던 날이죠. 분명 피할수 있었던 인재였음에도 많은 희생을 낳은 타이타닉의 사건처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들이 발생하고 있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살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상 모다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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