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사태로 14년여에 달하는 박정희 독재체제가 비극 속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10.26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등 육사 11기 출신 들이 비밀리에 결성한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세력을 형성 12.12사태를 통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등을 불법으로 체포 군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전두환은 k-공작계획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 정보기관을 장악했으며,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권력 장악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유신잔당 퇴진, 개헌중단,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가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1980년 2월 복권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김대중과 야당인 신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의 경쟁이 과도해지게 되어 정치적 분열이 일어난 사이, 신군부는 정권장악을 위한 공작과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군부의 정권장악 야욕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발생하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 전국의 대학생을 비롯 시민들까지 참여한 시위가 10여 만명이 참여하여 일어나기도 합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하에 정당활동 금지와 국회 폐쇄등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언론과 출판활동을 사전검열하는 포고령 10호를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각종 집회활동을 금지시키고 학생과 김대중, 김영삼 등 재야 정치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집회가 있을 것을 예상한 신군부는 전국 각지에 공수부대를 배치 강경대응을 예고합니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전남대 학생들이 등교하기 시작하자 계엄군은 이를 저지합니다. 등교가 불가능해지자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하며 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학생들과 계엄군간의 대치가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요. 계엄군은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과 학생들을 진압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19일 오후가 되자 분노한 시민들이 파출소에 방화를 지르고 시위하는 시민이 늘자 계엄군은 무차별적으로 가리지 않고 폭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9일 오후 4시반경 최초의 실탄 사격이 발생 합니다. 늦은 저녁에는 트럭, 택시, 버스 등을 타고 등장한 차량 시위대가 등장하기 하자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밀린 계엄군은 20일 밤 11시경 시민들에게 발포를 감행하였고 시위대는 다음날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합니다. 그리고 21일 전날 계엄군과의 충돌로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시위대는 시외에서 총기류를 탈취 무장을 하게 되었고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장갑차를 확보하며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1일 오후 1시경부터 금남로에 진출한 시위대를 향해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하기 시작하였고 도망가거나 부상자를 옮기는 시민들을 향하여 주요빌딩에 올라가 조준 사격을 하기도 합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게 되고 시민군과 대치하던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광주외곽으로 퇴각을 하게 됩니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시외를 근거로 매복하며 광주를 봉쇄시키는 한편 시 외곽에서 시민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주남마을 소형버스를 향해 무차별적인 총기난사사건으로 17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있었죠.

한편 시내에 있던 시민들은 희생자를 수습하고 대책 마련을 함께 의논했으며 먹을 것을 나누고 헌혈을 하는 등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 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주변을 완전 포위하고 시가지 전투를 벌이던 계엄군 특공대와 시민군과의 교전은 한시간 여 만에 끝나게 되고 많은 희생자를 낳은 채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5.18의 배후에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를 지목하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여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만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사형에서 감면을 해주게 되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더욱더 힘을 받게 됩니다. 결과 전두환은 1980년 9월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5공화국을 탄생시킨 전두환은 7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죠.

하지만 6월민주항쟁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책임자로써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바램으로 1995년 5.18관련 특별법이 제정 되었고, 결과 전두환·노태우 및 12·12 및 5·18사건의 관련자들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라는 죄목으로 사형 및 무기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1998년 관련자들이 특별복권 됩니다. 5.18은 길었던 독재의 비참한 말로 끝에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시민들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으켰던 시민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 사건의 당사자들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하나뿐인 목숨을 희생하며 민주화를 바램 했던 40년 전 그때 그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상 모다담이었습니다.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